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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매임지
2009.07.18 13:08 어제/어제의 책·음악
온다 리쿠의 소설은 묘한 힘이 있다. 책장을 한 번 펼치면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힘. 그래서 온다 리쿠를 읽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두렵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소설도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빨간 표지에 몇몇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온다는 책. 선택받은 사람들이 오직 딱 하루만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있다는 그 책은 기묘하면서도 묘한 책이다. 4장으로 이뤄졌다는 그 책처럼 이 소설 역시 4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그 4장이 각기 다른 구성으로 쓰여져있다. 액자 소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각 장이 모두다 흥미롭다.

그 중,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책을 찾아내는 이야기인 1번째 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좀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글쎄요. 일본사회 자체가 책 읽는 사람에게 냉담해요. 책을 읽는다는 건 고독한 행위고, 또 시간도 걸리잖습니까. 그런데 일본사회는 바빠요.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느긋하게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책 따위는 읽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이에요. 예를 들어 제가 상사에게 회식에 못 가겠다고 한다고 해요. '오늘은 얼른 집에 가서 저번에 줄 서서 산 비디오 게임을 하고 싶거든요'라고 거절합니다. 상사는 쓴웃음을 짓기는 하겠지만 '못 말리는 녀석이군. 저녀석 오타쿠라니까' 하고 말죠. 하지만 '오늘은 얼른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싶거든요'라고 거절하면 어떨까요? 상사는 틀림없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거고, 저에 대해 반감을 가질 겁니다. 비디오 게임은 획일적이고 본인의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안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남들과 다른 일을 생각하는 사람, 혼자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간주됩니다. 상사의 처지에서 보면 '저 녀석, 내가 모르는 데서 나 몰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같은 식이죠. 요즘 '가치관의 다양화'니 뭐니 하지만, 저는 완전히 양극화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 다양함이 존재하는 세계와 대다수의 보수적인 세계, 제가 지금 있는 환경도 그렇지만요, 그 세계는 지금 롤러로 밀듯이 무조건 한 가지 색깔로 칠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수파에 속하는 평균적인 일본인은 다양한 쪽 세계의 사람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지만, 자기하고 같은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미워합니다. 혼자서 다른 걸 하지 마, 혼자서 다른 걸 생각하지 마, 하고 말이죠. 일본 사람은 인간관계를 귀찮아하면서도 또 고독에는 굉장히 약하지 않습니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다 함께 똑같은 일을 하는 데 있는 셈이에요. 저 사람도 나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난 고독하지 않아. 그런 거죠. 그래서 자기만 다르다든지,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다른 일을 한다든지 하는 일에 많이 민감한 걸 겁니다."

굳이 일본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누구나가 똑같이 경쟁사회에 내몰리고 저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요즘, 다른 걸 한다는 것은 상당히 괴이한 일로 여겨진다. 

정말이지 회식 자리를 빠지는 이유가 '오늘 꼭 읽고 싶은 책이 있다'이면 안되는 걸까?

- 2009년 40번째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 - 6점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posted by 볼매임지
2009.07.18 11:46 어제/어제의 책·음악
'해피 해피 스마일'은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꼬맹이를 키우면서 일어난 일들을 적은 일종의 육아일기이다. 

아이들의 행동을 잘 관찰하고 있으면, 정말 어쩜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놀랍고 재미있을 때가 많다. 그 순간순간을 우리는 그저 웃고 말지, 일일이 기록하진 않는다. 

이 책은 그 기록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 장, 한 장의 에피소드마다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어떤 장면에서는 박장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만큼 아이들의 행동은 어디로 튈 지 모른다. 특히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라면, 도대체 어떤 말들이 쏟아질 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이 꾸준한 인기를 끄는 것도 그 순수함에서 나오는 의외성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어른이 된 우리들은 잊고 살았던 그 생각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해피 해피하게 스마일했고, 아이들과 놀고 싶어졌다. 

우리 꼬맹이가 나를 좀처럼 "엄마."라 불러 주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하루에 천 번도 더 부르게 되었는데 말이죠.
어떤 경우에도 아이 떄문에 시샘하는 일은 없던 나(사내아이를 낳은 엄마의 여유)인데, 그때는 좀 초조해지더군요. 주위에서도 "왜 엄마라는 말은 하지 않니?" "아빠가 더 좋은 게 아닐까?" 하고 말들이 많아, 그럴 떄마다 가슴이 찌릿찌릿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분발,
"엄마야, 엄마!" "엄마라고 해 봐!" 
그런 말을 수도 없이 건넸는데도 여전히 불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빠'만 죽어라 부른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죠.
플로리다의 한 호텔 침대 위에서, 밤 3시에 시차 때문에 몽롱한 꼬맹이가 불쑥 "엄마!"하고 부르면서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엄마!"(엄청 흔들어 대더군요.)
"어? 지금 엄마라고 했니?"(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엄마!"(배고파! 우유 줘!)
"아유, 우리 꼬맹이!"(꼭 껴안는다.)
"엄마!!!!"(바동바동, 빨리, 배고프다니까!)
말하려는 내용에는 서로 어긋남이 있었지만,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알았으니까, 이제 자!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엄마 마음에 세면대에서 바삐 분유를 탔지요. 
 

- 2009년 39번째 책

해피 해피 스마일 - 8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posted by 볼매임지
2009.06.16 11:22 어제/어제의 책·음악

이 릴레이는 블로거 Inuit님이 발기하시고, buckshot님 => 고무풍선기린님 => 류한석님 =>mahabaya님 => 어찌할가님 => 벼리지기님 => 바람의 노래님 => 모노피스님 => 꼬미님 =>Jaeho Choi님 => youngminc님 => 데굴대굴님 => 한방블르스님 => 필로스님 => 무한님 => 섹시고니에서 느낌, 극락같은으로 이어진 릴레이입니다.

 

 

올해 책 300권 읽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것저것 할 일들이 쌓이니 책도 제대로 못읽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45권 정도를 읽었는데, 독서 + 리뷰까지 하려니 더 진도가 안나가네요. 그래도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보렵니다.



* 이 릴레이를 작성하는 규칙은 이렇습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독서란 [오르가슴]이다

우연히 집어든 책이 내 취향과 딱 맞을 때, 거기서 오는 흥분을 달리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들과 상황이 펼쳐지는 스토리 앞에서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좋은 책을 발견하는 것도, 그 책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제겐 놓칠 수 없는 흥분입니다.

한 번 경험하면, 마치 중독처럼 계속 경험하고 싶은 것.
같은 작가, 같은 소설만이 아닌 여러 작가와 여러 책들에서 다양하게 얻을 수 있는 것.
다른 사람들은 읽어보지 못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남모를 기쁨.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 역시 재밌게 읽었을 때 그 교감에서 오는 쾌감.
헌책방의 책장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인 먼지 냄새에서 오는 활자의 깊은 매력.

어느 것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가슴 속을 계속 충동질하고, 흥분케하는 독서는 그래서 제겐 '오르가슴'과 같습니다.

 


블로거와의 인간관계가 협소한 저는 다음 주자로,


여행을 좋아하고, 길고양이들을 사랑하는 낭만 시인, dall-lee님께 독서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dall-lee님은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는 친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데면데면한 로뿌호프님께 독서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로뿌호프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죠^^ 로뿌호프님은 주머니속의 송곳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posted by 볼매임지
2009.06.09 22:49 어제/어제의 책·음악
천천히 걷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이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우도는 그냥 봐도 낭만적인 곳이지만
느리게 가면 느리게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이는 곳이다.

시집 한 권 들고, 천천히 섬을 음미해서 걸으면 좋을 것 같다.

 
저녁놀 앞에서는

저녁놀 앞에서는
그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없는 것 같아서
옆자리를 더듬었다


한하운 시인 생각

가도가도 검은 돌밭길
길가에 앉아 신발을 벗어보니
아직도 발가락이 다섯
가도가도 닳지 않는 내 발가락
고맙단 말 절로 나온다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한하운의 시「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서)

가난한 시인에게 고마운 것은 건강한 육신이다.
손가락도 고맙고 발가락도 고맙다.
나는 돌담 밑에서 신을 벗으며
걷기 불편했던 한하운 시인을 생각했다.
오래 전에 그가 그리워 소록도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시비(그의 시비는 누워 있다)에 걸터앉아
신을 벗고 내 발가락을 봤다.
그때나 지금이나 발가락이 성한 나는 행복하다.

- 2009년 38번째 책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 6점
이생진 지음/책이있는마을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18 15:04 어제/어제의 책·음악
에가미 고의 '실격사원'은 직장 생황과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세의 십계명에 견준 10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는 이 소설은 공감도 가고, 재미도 있다.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건,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 서글펐기 때문이다.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스카웃과 이직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급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더이상 연봉이 오르지 않을 때, 자신의 일에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많은 직장인들이 이직을 생각한다. 이 때, 마침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다면, 망설일 자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리분별 없이 피와 땀을 흘리는 이야기이다. 한 번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 권력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 이외의 다른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쓴다. 남을 괴롭히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다. 권력의 '달콤함'을 유지하기에는 '쓴맛'이 너무 깊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권력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의 측근 비리부터 시작해 권력있는 자들의 측근 비리가 끊이지 않는다. 본인 능력 밖의 일을 자신과 친분이 있는 권력자의 힘을 빗대어 처리하다보니, 결국은 감당못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굳이 정·재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경우는 직장 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측근의 지위와 권력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빨리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밤도 낮도 없고, 휴일도 없이 일하는 직장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이 이야기가 가장 섬뜩했는데, 은행 업무만을 해오던 야스마가 IT기업에 임원으로 취업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책상에 앉아 쉼 없이 일하는 은행과는 달리 개인 책상도 없이 직장 내 카페와 숲길 등에서 사람들과 잡담하듯이 일하고, 주말에는 회사에 나오지 않는 IT회사. 야스마는 IT회사 직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를 바꾸려고 하는데, 알고보니 그 직원들은 집에서도 회사와 같이 쉼 없이 일하고 있었다. 요즘 최고의 직장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부모와 같은 존재를 공경하면서 동시에 독립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직장에서 본인이 정한 롤 모델이나 존경하고 싶은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때론 잘못된 판단을 한다.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도 무조건 믿고 따를 게 아니라 'NO'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어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피 튀기는 경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살인을 하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살인에 준하는 행동들은 많이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나친 경쟁에 내몰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일, 한 번의 실수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폭언을 일삼는 일 등등 사람을 못 살게 구는 일을 우리는 오늘도 하고 있을 지 모른다.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일도 결국은 죽음으로 내모는 길일 수 있다. 

'간음하지 말라'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그것을 역이용하는 성희롱에 대한 사례는 그동안에도 있어왔다. 이제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했지만 관료 사회나 고지식한 어른들이 많이 있는 직장에서는 아직도 인식이 희박하다. 교육보다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아랫 직원의 성과를 가로채는 상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일이 계속 생기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그 때 그 때 상사에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평가하는 상사에게 밉보인다는 것은 직장 생활에서 아주 두려운 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합리한 처사를 하나, 둘 참다 보면 결국 벼랑 끝에 내몰리는 것은 자신이 될 뿐이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담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담합이란 결국 서로가 피해를 보지 않으려는 위태로운 협력 관계이다. 언제 깨어질 지 모른 채 서로를 경계하는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신뢰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담합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꺼지기 쉽다.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직장인보다는 기업간의 윤리적인 문제가 크다.
기업과 기업의 인수, 합병 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속에서 어떤 암투들이 벌어지는 지를 잘보여준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무능력하거나 비도덕적인 인물, 지극히 계산적인 인물들이 모두 벌을 받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들은 응당의 댓가를 받지만 어떤 사람들은 또 그대로 성공한다. 딱히 권선징악을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직장 내의 여러 가지 모습들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비겁한 짓을 해도 성공할 수는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2009년 37번째 책

실격사원 - 8점
에가미 고 지음, 김주영 옮김/북하우스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16 17:54 어제/어제의 책·음악

많은 사람들이 고흐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은 몰라도 고흐 작품 하나쯤은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고흐를 알고 있을까?

고흐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려 노력은 해야 한다. 고흐가 겪었을 외로움, 실연, 사랑, 고독에 대해...

그동안 고흐를 잘 이해한 사람은 돈 맥클린(Don mclean)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고흐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고흐, 또는 그의 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맥클린은 당당히 'Vincent'를 불렀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그림을 볼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줬다.

빈센트를 듣노라면 별이 빛나는 밤에와 고흐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림 속에 묻어나는 고통들이 전해지는 것 같다.

돈 맥클린과 더불어 고흐를 잘 이해하고, 시로써 그림을 보여주는 작가가 이생진 시인이다. 이생진 시인은 '반 고흐, 너도 미쳐라'라는 시집을 통해 고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속에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고흐의 모습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을 통해 고흐가 그렸던 다른 그림들을 보게 되고,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의 방

고흐가 지나간다
숲길로 지나간다
라일락 색 바탕에 노란 점박이 옷을 걸치고
너구리처럼 지나간다
제 손으로 만든 옷이다
테오도뤼스 목사는 그 옷이 보기 싫어
아들이 돌아오는 길을 피해 집으로 온다
아들은 아버지가 오는 길을 피해 집으로 온다
부자父子는 한 지붕 밑에서 피할 수 없는 피
아버지는 성경을 들고
아들은 졸라의 소설을 들고
아버지는 졸라의 소설을 싫어하고
아들은 성경을 싫어한다
구렁이 껍질 같은 옷에
졸라의 소설을 읽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해 쓰러졌다
(1885년 3월 26일 뇌졸중으로 사망)

아버지가 안 계신 방이 더 넓게 비어 있다
펴놓은 성경책에 졸라의 소설
촛대엔 불이 꺼지고
성경에 촛대만으로도 엄숙한 그림이 되는데
왜 집어 던지듯 졸라의 소설이 놓여 있을까
고흐에게 물어보고 싶은 그림이다
아버지가 가신 후 동생에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농민이란 단정한 옷차림으로 교회에 가는 모습보다
작업복을 입고 밭에 있을 때의 모습이 훨씬 진실하다
(1885년 4월 30일)'



한 때 광산에서 일했던 고흐는 광부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을 읽고 디킨스의 소설을 읽던 고흐는 그들과 함께 절망했고, 목사인 아버지와 등을 돌렸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적어도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해바라기' 만으로는 어렵다'.

고흐의 절망을 함께 보려면 '석탄을 운반하는 여자 광부들'을 보아야하고,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아야하고, 사람들에게 버려진 여자 시엔을 그린 'Sorrow'를 보아야 한다.

'미치광이'쯤으로 알려진 고흐는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했던 예술가였다.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해 아파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 고흐와 고갱이 각각 그린 '지누 부인'을 보면 이들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지누 부인의 초상화

지누 부인은 카페 '드라가르'의 주인이다
드라가르는 '노란 집'에서 가깝다
그들은 노란 집에 와서 카페부터 다녔다
지누 부인이 오전엔 한가해서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하자
그들은 지누 부인을 그렸다

지누는 고흐에게 노란 집을 소개해 줬고
고흐가 노란 집에서 떠날 때 고흐의 짐을 보관했던 여인이다
고흐는 그녀 앞에 책을 놓고 되도록이면 우아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고갱은 술집 여자가 책은 무슨 책이냐고 비웃었다
고갱은 그 여자 앞에 술병과 술잔을 놓고 그녀 뒤엔
우체부 룰랭이 건달들과 술 마시며 떠드는 장면을 그리고
그들이 기댄 벽을 빨갛게 칠했다
고흐는 노랗게 칠했는데...
이렇게 성질이 각각인 두 사내가 한집에서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두 달(1888, 10~12) 동안의 불화 끝에
고흐와 고갱은 헤어졌다



지누 부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 여기에 두 사람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들어있다. 사람에 대한 애정,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그저 그림만 봐도 달리 설명이 필요 없다.

이생진 시인의 시를 읽으니, 고흐는 내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고흐를 모른다. 반 고흐처럼 '너도 미쳐라'.

- 2009년 36번째 책


반 고흐 너도 미쳐라 - 10점
이생진 지음/우리글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13 13:09 어제/어제의 책·음악
'예쁘고 편안한 카페 하나 열어서 음악도 듣고, 내 시간도 가지며 밥벌이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많은 사람들이 해보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물론 아직도 그 생각은 유효하다. 주변에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많은 것 같다. '낭만적 밥벌이'는 어쩌면 모든 월급쟁이들의 이상향은 아닐지.

오래된 친한 친구와 순대국을 먹다 카페나 해볼까하는 생각으로 카페를 차리게 된 이야기를 전하는 '낭만적 밥벌이'는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 카페 사장님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지 본인의 경험과 시행착오들을 바탕으로 이야기 한다. 우여곡절 끝에 '키키봉'은 홍대에 '리앤키키봉'이라는 카페를 연다. 그 후에도 역시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카페를 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에 눈을 떴다. 무작정 덤빌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한다는 것도. 카페를 꿈꾼다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은 도움이 됐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지금의 내 심정과도 이렇게 비슷할까 싶어서. 초보 사장님이 카페에 틀 음악을 찾기 위해 레코드 가게에 갔다가 그곳의 여성 분에게 반했다는 이야기이다.

나이를 먹으면 왜 심장이 더 작아질까? 스무 살 때는 데이트 신청할 때 차일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호감 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차일까 고민이고 나이 차가 많을까 또 고민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은 가뜩이나 소심한 키키봉을 한껏 움츠러들게 만들다.

정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심장이 더 작아지는 것일까? 호감 가는 상대를 만나도 차일 것이 걱정돼 말 한마디 제대로 건내질 못하겠다. 예전에는 차이거나 상처 받더라도 마음을 전하는 것만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상처 받을까봐 걱정이다. 그래서 사람을 한껏 움츠러들게 한다.

이런 내 자신이 한심스러우면서도 용기는 또 안난다. 카페를 차리는 것도 용기, 호감 가는 사람에게 말 거는 것도 용기인가 보다. 카페를 열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저지르는 과감성이 필요하다면,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와 과감성을 가져야할까?


- 2009년 35번째 책

낭만적 밥벌이 - 6점
조한웅 지음/마음산책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12 16:56 어제/어제의 책·음악
여행책보다 더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책. 이생진의 시집이 그렇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읽다보면 성산포로 달려가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싶어진다. 봤어도 보지 못한 바다의 모습이 그곳에 남아있는 것 같다.

이생진 시인은 2001년 이 시집으로 서귀포 명예시민이 됐다고 한다. 그만큼 이 시집이 서귀포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리라.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이 시에서처럼 사실 바다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지도 모른다. 같은 바다일지라도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바다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가 더 잘 사는 건지도 모른다.

절망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사람의 절망을 삼키고, 들어주는 바다. 친구 못지 않게 소중한 존재다.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이미 친구가 된 모습이다. 나도 그랬다. 친구가 기쁜 날도 화나는 날도 내가 취했다. 술에 약하지 않지만 친구가 술에 취해야하는 날은 내 술이 약해졌다. 바다를 앞에 두고 꼭 술 한 잔 마시고 싶게 만드는 시다.

저 세상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 다시 오자
이 짧은 시 한 편이면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좋은 바다.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시를 읽으면 성산포가 누구에게나 그리운 바다가 된다.

- 2009년 34번째 책

그리운 바다 성산포 - 8점
이생진 지음/우리글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12 08:58 어제/어제의 책·음악
아직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긴 하지만, 와인은 이제 어느 정도 친숙한 술이 됐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고, 마시긴 하지만 처음 와인을 고를 땐 망설여하는 게 보편적인 모습이다. 나는 와인을 잘 모르니 네가 골라라하는 겸손한 경우는 태반이고, 와인에 대해 조금 공부한 사람은 마치 와인을 다 안다는 듯이 재고 다닌다.

사실 와인이든 소주든 기쁜 날 기쁘게 하고, 슬픈 날 위로하고, 취하고 싶은 날 취하게 하면 그게 좋은 술이 아닌가.

'와인 정치학'은 바로 이런 면에 접근했다. 사람들이 와인을 어려워하는 건 와인 라벨을 읽고 이해하는 데서 부터다. 이 책은 와인 라벨 이면에 감춰진 정치 관계, 경제적 이익 관계들을 파헤치고 있다.

주로 구대륙 와인의 대표주자인 프랑스와 신대륙 와인의 대표주자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와인의 역사와 등급, 품질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보르도 와인과 프랑스 와인 등급인 A.O.C 등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와인 전문 평론가 티쉬는 "점수를 매기는 게임으로 와인 거래업자들 사이에서 태만과 자기만족, 그리고 무지가 양산되었다. 그에 따라, 소비자들은 와인이 '측정 가능한' 대상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객관적인 수치로 보이는 평론가들의 평가 점수가 자신들을 포함한 다른 평가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와인 상점을 운영하는 한 여주인이 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수치로 나타내는 평가가 가진 문제점은 "비록 어떤 와인이 좋은지를 말해주기는 하지만, 점심 식사에 치킨 샐러드와 잘 어울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점수는 음식과의 궁합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점수는 모든 와인이 언제나 동일한 맛을 낸다는 점을 전제로 하지만, 여름날 야외에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레드 와인이나 한 겨울에 로제 와인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전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본인 역시 와인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는 비싸다는 와인보다는 마주앙처럼 달달한 와인이 좋았다. 와인은 맛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하나 둘씩 와인을 접했을 땐 점점 달지 않은 와인을 찾게 됐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와인을 기억해두고 다음에 다시 먹곤 했는데, 그 와인이란 것이 늘 같은 맛은 아니었다. 안좋은 기억이 있는 와인도 다른 자리에서 먹으니 또 맛이 좋았고, 좋았던 기억의 와인을 다시 먹으니 이번엔 너무 가볍게 생각되기도 했던 것이다.

같은 빈티지의 같은 와인이라 하더라도 분위기, 와인과 곁들인 음식, 와인 보관 방법, 와인을 마시는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이런 사실을 간과한다. 누가 좋게 평가했다는 와인, 올해 최고의 와인으로 뽑힌 와인 등 자꾸 와인에 대한 가치를 되새기며 와인 맛을 음미하려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와인 라벨에 세뇌당하는 모습이 아닐까?

와인을 좋아한다면, 와인 라벨을 읽는 법 뿐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 2009년 33번째 책

와인 정치학 - 6점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posted by 볼매임지
2009.05.03 08:20 어제/어제의 책·음악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 나오는 성탄특선을 읽으니, 서툴렀던 내 크리스마스가 절로 떠올랐다.

어쩜 그리 다들 똑같았을까. 우린 그 때 왜 그렇게 서툴렀을까.

서로 돈 없는 학생이던 그때, 남자친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날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패밀리 레스토랑 중에서도 좀 더 비싼 곳이었다. 그때 당시 난 패밀리 레스토랑을 다니지도 않았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던 터라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도 마셨던가. 그리고 나서 선물을 교환했다.

난 고심해 고른 선물을 직접 포장해 나름 성의를 전달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민 건 14K였나 18K였나. 아무튼 노란 빛을 발하는 팔찌였다. 팔찌는 커녕 귀걸이도 안하고 다니던 때 받는 선물로는 꽤나 호사스러웠다. 그 친구가 직접 채워준 팔찌를 차고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상하게 설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다고나 할까.

그리고 정작 크리스마스 날인 다음날 우린 만나지 않았다. 그땐 왜 만나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생각해보니 경제적인 부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근사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위해 경제적 고통을 짊어진 셈이다. 

그리고 또 다른 크리스마스. 군인인 남자친구는 마침 휴가를 나왔다. 우리에겐 아무 것도 필요없었다. 선물이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들뜬 마음에 우리는 호기롭게 근사한 모텔로 들어갔으나 곧 어려움에 봉착했다. 방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동네의 모텔이란 모텔은 다 들락날락했던 기억이 난다. 무척 춥고, 지쳤지만 어딘가 우리가 갈 곳 하나쯤은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이름만 모텔일 뿐인 허름한 곳을 찾았을 땐, 그저 기뻤던 것만 같다. 그 뒤의 섹스가 황홀했는 지 어땠는 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크리스마스엔 방이 없다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식만 챙겼을 뿐이다. 그래도 그 덕에 크리스마스에 방이 없어 헤매는 실수는 다신 하지 않게 됐다.

처음 들어간 모텔에서 그들은 퇴짜를 맞았다. 두 사람은 '그러려니' 했다. 서울에 모텔만큼 많은 것도 없을뿐더러, 다른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두번째로 들어간 모텔에서 돌아 나와야 했을 때도 그들은 별 생각이 없었다. '평소 주말에도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시간 넘게 시내를 돌아다녀도 빈방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크리스마스엔 숙박업소의 방이 금세 차버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중략)

여자는 성탄절에 모텔 하나 예약해두지 않고, 늦게까지 술집에 앉아 있던 남자의 주변머리에 화가 났다. 남자는 운전을 하면서 모텔을 찾느라 예민해져 있었다. 한 번 들어가기도 머쓱한 곳을 열 군데 넘게 들락거리다 보니 왠지 여자와의 동침에 목맨 인간처럼 느껴져 언짢기도 했다. 그리하여 여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남자의 말투가 짜증스러워진 것은 두 사람이 벌써 세 시간째 거리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로에서 시청으로, 서울역에서 영등포로 모텔을 찾아 내려갔다. 두 사람은 뚱한 표정으로 각기 다른 곳을 내다봤다. 하지만 눈으로는 끊임없이 모텔 간판을 찾고 있었다. 모텔만 찾는다면 쉽게 화해하고, 포옹하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크리스마스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바에 가더라도 오래 기다려야 하며, 오래 머물러서도 안되며, 가격은 더 비싸다는 걸. 놀이동산은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고, 지루하고 그저 그런 내용의 크리스마스용 러브 스토리 영화를 왜 보는지 조차 모르게 보고 있고,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무수한 커플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는 해마다 그 일들을 반복한다. 평소보다 더 고급스러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애써 분위기를 잡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굳이 그런 길들을 밟지 않아도 확인할 수도 있는 건데,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는 그렇게 누군가가 왜 그땐 그걸 몰랐는지 생각될 만한 이야기 꾸러미 하나씩을 풀어 놓는다. 우리 중 누군가가 살아왔던 어제의 이야기이다.

- 2009년 32번째 책

침이 고인다 - 6점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볼매임지